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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 시네마] 신 고질라- -이황석(미디어스쿨) 교수, 칼럼-

  • 조회수 601
  • 작성자 미디어스쿨관리자
  • 작성일 20.07.07

http://www.m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944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와 영화 ‘일본침몰’의 감독 히구치 신지가 공동 연출한 2016년 작 ‘신 고질라’는 역대 일본영화 수익 1위에 랭크된 작품이다. 2017년 일본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해 7개의 상을 석권하기도 했다. 

사실 1954년에 일본에서 처음 선보인 고질라 시리즈는 개작과 더불어 진화를 거듭해왔다. 최초 개봉 당시에도 일본에서 90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신 고질라 역시 82.5억엔(약 900억원 상당)의 수입을 올렸다고 하니 엄청난 흥행작임이 분명하다.

일본 내에서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데에는 일본인들 의식 아래에 잠재된 특별한 역사관과 세계관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핵물질을 에너지원으로 삼는 폭발적인 힘을 가진 괴수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따라가다 보면 일본사회에 내면화된 집단 무의식에 어떤 심리적 기제가 깔려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영화를 해석하기 위해선 여러 층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재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국가라는 시스템의 허술함과 무능함에 대한 세계보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일본사회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는데, 바로 이점이 자국민들에게 강하게 어필했다고 보여진다. 나아가 일본내부의 진보와 보수적 가치가 부딪히는 쟁점의 팽팽한 줄 위에 올라 균형을 맞추며 양가적 해석 역시 가능하게 한다. 반대로 이 같은 수작임에는 분명하나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는 매우 위험한 요소가 내재돼 있다.


뒤로멈춤앞으로
‘신 고질라’에는 일본의 수도 도쿄만에 정체불명의 괴수가 출몰한다. 사건 발생 초기 민간의 피해가 급증하지만 정부는 원인 규명도 제대로 못한다. 마침내 생물학적 체내 핵분열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받는 괴생물체의 정체가 밝혀지지만 퇴치엔 역부족이다. 재래식 무기도 고폭탄도 소용없다. 게다가 괴수는 세대교체 없이 자체적으로 진화하고 무성생식으로 분화가 가능한 상황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이 괴생물체로 인해 일본은 물론 인류 전체의 생존이 위협받게 된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의 개입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핵폭탄으로 괴물을 제거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나 괴물을 제거하더라도 수도권은 초토화되고 수백만이 희생된다. 자포자기의 상황에서 어렵게 꾸려진 위기대응 팀(구성원들은 소위 오타쿠로 분류될 수 있는 이단적인 인물들이지만 이들은 관료주의가 배제된 수평적 협업을 통해 각각의 능력을 극대화시킨다)은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하고 해결책을 찾아낸다. 

그 방법이란 핵분열 과정 중 발생하는 열을 통제하는 괴수의 혈류냉각시스템을 역이용해 구강으로 응고제를 투여해 동결시키는 것이다. 대원들의 투혼과 희생으로 고질라를 동결시키는 데 성공하고 핵폭탄 투하 직전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일본을 구해낸다. 

우선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관료주의적인 정부가 예견하지 못한 재난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우왕좌왕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매우 극사실적이다. 이로써 일본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민주주의국가의 포맷을 갖춘 나라의 모든 정부는 위기 상황에서 그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시간을 허비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영화는 보편성을 확보한다. 

근대적 정부시스템의 보고체계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즉각적인 대처가 불가능하다. 정부각료들은 제각기 다른 이해관계와 책임소재를 따져 대책을 내놓지만 허술하기 그지없다. 마침내 자위대의 출동을 결정하고 퇴치를 시도하지만 그 역시 무기력하게 실패하고 만다. 급기야 미군이 개입하고 B2폭격기에서 벙커버스터폭탄이 투하된다. 

하지만 도리어 부메랑이 돼 괴수의 등에서 방사선류가 방출돼 미사일과 폭격기는 물론 도심전체가 파괴된다. 이때 내각의 수상과 주요각료들이 탄 헬기도 공중에서 증발해 버린다. 이제 연공서열에 따라 외국 출장으로 목숨을 건진 농림수산부장관이 임시수상이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극이 전개되는 방식을 톺아보면 일본 특유의 집단의식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일종의 비교문화 차원에서 볼 때 다른 나라들의 영화와는 판이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면 할리우드 영화 ‘인디펜던스데이’ 역시 갑작스러운 외계인들의 공격에 무방비한 정부가 등장한다. 그러나 서사의 끝은 서구 특유의 영웅 서사로 급선회해 위기에서 지구를 구한다. 한 개인이 전체를 구할 수 있다는 의식의 흐름은 기독교적 구원 사상에서 출발해 현재에는 공고한 미국의 연방주의 대통령 중심제와 맥락을 같이한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대부분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내러티브의 기조가 되기도 한다. 

반면 신 고질라에선 영웅으로서 개인이 물러나 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문제해결 방식 역시 집단지성의 힘으로 시스템을 재가동하고 마침내 괴수를 퇴치한다. 영화초반부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각료회의를 하던 정부 관료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전멸한다. 요행히 살아남은 자들로 다시 임시정부를 꾸리고 시스템이 정한 연공서열로 무능력한 외직의 장관이 정부수장의 자리에 오른다. 그는 절체절명의 순간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서도 자신의 역사적 평가를 걱정하고 회의로 늦어진 식사로 불어터진 우동의 면발에 대해 불평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국의 고압적인 자세에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를 움직여 일본 자체적인 작전을 수행할 시간을 벌고 이로써 나라를 구한다. 주인공 야구치 역시 개인이 뛰어나다기보다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하기에 있고 그에 맞는 일을 수행한다. 제 각각 자신의 일을 수행하며 일을 수습해 간다. 영웅의 자리는 시스템을 부분적으로 수정해가며 나아가는 집단의 조직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신 고질라에는 일본 특유의 정치문화에 대한 사회 저반의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지배이데올로기를 고발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공고히 한다. 먼저 시스템의 오류에 대한 전면적으로 의심하고 부정하는 사고방식이 부재하다. 극 중 인물들의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은 그저 푸념 정도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제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이 정해져 있고 그에 알맞게 수행한다. 주인공 야구치는 은연중에 주변 인물들로부터 머잖은 미래의 총리로 언급된다. 그의 아버지는 정부의 고위관직을 지낸 유력자였다. 야구치 역시 이 점을 당연시하고 아버지와 연계돼 있던 관료들의 도움을 받는다. 

야구치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미국 정부의 특사, 패터슨의 경우도 역시 미국 상원의원의 딸로 정치명문가의 일원이다. 일본계 미국인인 그녀 또한 부모의 후광을 엎고 젊은 나이에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 그녀 역시 극 중 미래 미국의 대통령감으로 언급된다. 이로써 정치명문가라는 계급사회를 공고히 한다. 한마디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실제로 일본 특유의 가업문화에 정치도 예외일 수 없다. 정치가문의 자손들이 지역구를 이어받아 중의원이 되고 참의원이 된다. 현재 일본의 아베 내각만을 살펴보아도 자명해 보인다. 

 


(사진=영화 '신 고질라' 스틸컷)
역사주의맥락에서 바라보아도 디테일에서 일본인들의 무의식적인 태도가 보인다. 피해자라는 강한 자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극 초반 괴생물체의 출몰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는 정부각료의 태도엔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의 피해를 곧이곧대로 받아드리지 못했던 과거 군국주의시대의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자위대의 출동을 결정하기까지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전후 평화헌법체제가 그들에겐 보통국가로의 모습과는 동떨어진 무기력한 이상적인 체제일 뿐이라는 의식을 자각하게 하고 자발적인 반성을 유도한다. 

그러나 반성의 대상이 왜곡됐다. 우리에겐 ‘피해자 코스프레’로 비출 수 있는 것이 그들에겐 평화헌법이야말로 패전의 결과로서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된다. 바로 일본 극우의 뿌리가 되는 역사 수정주의가 출발하는 지점이다.

한편 괴수가 고폭탄 공격을 받고 그 에너지를 다시 방출하는 모습은 흡사 일본의 전범기인 욱일기와 닮아 있다. 등에서 방사되는 에너지는 사방으로 분출되고 무차별적으로 모든 것을 파괴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해석은 다시 가지를 친다. 제대로 일본의 내재된 에너지를 통제하지 못할 때, 준동할 수 있는 군국주의 에너지가 일본 내부에 잠재돼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마지막 장면에서 보이는 고질라의 꼬리 끝의 형상이 인간이 불탄 군상들의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모체 고질라로부터 분화돼 진화할 인간형상의 객체들은 그대로 얼어붙어 군상을 이룬다. 극 중 설정은 인간을 능가할 생명종의 탄생을 멈추게 한 모티브로 활용됐다. 그러나 이미지의 표면 이면에 정서적인 장치는 일본의 피해자성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된다. 이는 히로시마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 폭발순간 동시에 화석화된 시체들의 아비규환을 상기시킨다. 동결된 고질라 역시 히로시마의 그 유명한 원폭 돔을 연상시킨다. 이 같은 장치를 통해 그들 스스로 피해자였음을 확인하고 있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 어느 면에서 틀리지 않다. 그러나 확실하게 해두어야 할 문제는 피해자라는 의식은 국가의 몫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피해자성은 전쟁수행의 주체인 군국주의 동원 체제에 수탈당한 핍박받은 민중이 있었다는 의식이 선행되고 그것이 시민사회에 만연할 때 가능한 논리이다. 한편 권력을 가진 자들이 수행하는 전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보통의 시민들이 의식화된 사회가 됐을 땐 이미 피해자란 자의식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전자와 같은 비약은 불행을 반복하는 우를 범하는 정도를 넘어 인류적 비극에 빠지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외면한 결과다. 따라서 피해자라는 자의식이 모든 것을 용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침묵 뒤에 숨는 행위 역시 동조자로서 일상에서 악과 결탁하는 방식이기에 모든 전범국의 구성원은 반성을 요구받아야 한다. 이 지점에서 고질라의 꼬리에서 튀어나오려다 그대로 동결된 인간의 형상을 한 군상들에 대한 해석은 일본내부에서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패전국이라는 피해의식에 기반을 둔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보는 관점이 그 하나라면 군국주의 피해자로서 민중의식에 기초한 성찰적 역사관에 대한 수행적 태도도 존재한다. 동결이 풀리면 언제든지 다시 일본 내부를 관료주의와 군사주의가 결합된 구심력과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한 원심력이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전자는 그것을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심리 기저에 깔려있다. 

인문지리학적인 측면에서 일본은 모순의 공간이다. 차라리 척박함만이 있는 지리적 조건이라면 자연에 순응해 생존이 덕목인 삶을 지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자연재해 후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름진 토양은 생활세계를 향상시키고 미래에 도래할 재앙을 더욱 공고한 방식으로 대비해야 할 운명을 지어줬다. 그러니 이제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천재지변은 숭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관점을 확대해 보면 그들에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폭탄 역시 신의 위력에 맞먹는 재난이었다. 일본인들에게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절대적 힘에 대한 숭배의식은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핵물질 역시 가공할 신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일본사회의 내면에 응축된 괴물성은 바로 이러한 종교적 승화다.

 


(사진=영화 '신 고질라' 스틸컷)
이와 같은 의식의 흐름은 핵물질 역시 일본 특유의 애니미즘 신앙과 만나 신적인 존재로 형상화하게 된다. 바로 고질라다. 1954년 원작 고질라(원명은 고지라)에서는 수소폭탄실험으로 깊은 바닷속 안식처를 잃은 고대 생물 고지라가 깨어나 난동을 피우는 설정이지만 2016년 ‘신 고질라’는 바다 속 핵폐기물을 에너지로 활용해 진화한 생물로 등장한다. 지극히 발전된 논리다. 이는 재앙을 기반으로 재건경제가 일본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자각이다.

일본은 재난과 재건의 반복 사이클 속에서 경제시스템을 가속화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 보면 유물론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와 일본의 정령신앙은 잘 맞는 구석이 있었다. 물질의 순화구조에서 인간은 소모될 뿐이다. 일본사회에 뿌리 깊은 죽음의 세리머니는 이와 같은 기제에서 출발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954년 작 ‘고지라’도 2016년 작 ‘신 고질라’도 모두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사 토호(東寶)가 제작 배급한 작품이다. 주지할 사실은 토호의 로고 역시 전범기인 욱일기와 닮아있다. 토호는 오래된 기업이다. 전쟁시기엔 선전영화를 제작한 주체로서 전범기업이었다. 일본의 주장처럼 일상에서 사용하는 전통문양이라는 논리로 활용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전후 피해자로서 위치를 점유한 일본이 과거사를 반성하지 못한 데서 온 잘못된 사례로 봐야 한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출처 : MS투데이 - 생활경제의 중심(http://www.ms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