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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오피니언 면)][칼럼]영화 ‘테넷’, 다빈치코드와 메시지사이에서-이황석 교수

  • 조회수 374
  • 작성자 미디어스쿨관리자
  • 작성일 20.10.19

ps://www.asiatoday.co.kr/view.php?key=20201018010009286


[칼럼]영화 ‘테넷’, 다빈치코드와 메시지 사이에서

기사승인 2020. 10. 18. 10:23                                     


이황석
시월 들어 모처럼 극장을 찾았다. 공부하느라 바쁜 아들 녀석이 영화 ‘테넷’을 보고 싶다 해서 기꺼이 동행했다. 그렇지 않아도 스크린에서 볼 기회를 놓치나 싶었는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팬으로서 잘됐다 싶었다. 그런데 머리도 식힐 겸 영화를 보고자 했을 텐데, 크레디트를 뒤로하고 나오는 길에 녀석의 안색은 묘했다. 주차장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차를 타고 시동을 켜는데, “아빠 이해했어?” 기습질문에 궁색해졌다. “글쎄다.”

대화가 이루어지기엔 스스로 정리가 되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영화를 보고 단번에 이해하기엔 해당과학지식이 일천했다. 관련 자료를 찾고, 그 내용을 이해하고자 많은 시간을 할애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후 일삼아 영화를 두 차례나 더 보고 나서도, 과학과 상상력 사이의 간극을 파악하기엔 모호한 지점이 많았다. 한마디로 공부가 부족했다. 그렇게 아들 앞에서 자랑질(?)을 할 기회를 무참히 놓치고 말았다. 이를 눈치라도 챘는지 아들은 유튜브 콘텐츠 몇 개를 카톡으로 보내왔다. “어때?”

재미있었다. 십 여분의 짧은 시간에 과학적 지식을 영화의 내러티브에 대위법처럼 펼쳐 놓는 솜씨하며, 디테일에 숨겨 놓은 다빈치코드들을 요목조목 설명하는데 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주요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마방진으로 연결돼 있다는 걸 소개할 땐 그 코드를 어떻게 찾았는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서만 스크린관객동원 190만 명이 채 안됐는데, 리뷰동영상 몇 편의 조회 수가 이에 육박했다. 시장이 형성되고 있었다.

사실 영화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주체로서 ‘미래’가 새로운 출발지점으로 삼고 있는 ‘현재’를 응징하기 위해 소환된 세력이 ‘과거’ 구소련에서 성장한 무기상이라는 설정이다. 말하자면 미래는 과거와 손을 잡고 현재를 원점으로 돌리려고 한다. 한편 시간을 되돌리는 ‘인버전’ 기술의 파괴력을 걱정한 미래의 한 과학자는 알고리즘을 조각내 9개로 나눠 과거에 숨김으로써 영원히 그 작동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미래주류사회는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도리어 죽음을 앞둔 과거 냉전시대 잔존세력을 소환해 기어이 알고리즘을 작동케 한다. 그리고 그들의 과거인 현재를 리셋 시키고 미래를 구원하고자 한다.

흔히 전투에 임하는 자가 예고된 자신의 죽음을 확장시켜, 세계의 붕괴와 연동시키고자하는 심리와 맥락을 같이한다. 일종의 ‘직선적 역사관’으로, 종말을 새로운 시작으로 삼고자하는 종교적 신념과도 같은 도그마로 무장된 테러집단과 유사하다. 이는 신화적 모티브로서 아마겟돈과 맞닿아있다. 미래에 창설된 반군세력인 ‘테넷’과 미래사회의 주류세력은 종말을 앞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마지막 전쟁을 현재세계로까지 확장시킨다. 그 이유는 현재가 미래의 과거이며 그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현재도 어떤 과거의 미래였기에, 결과적으로 미래주류세력은 대과거와 손을 잡고, 미래의 반군은 완료형으로서 현재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보로메오고리와 같은, 성공한 영화시리즈 ‘터미네이터’처럼 후속편을 기대하게 하는 지점이다.

어쩌면 ‘테넷’은 2차 콘텐츠시장을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를 통해 속편을 제작할 동력을 구하고 있진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스토리텔링의 모티브로 원용된 양자역학의 세계관에 압도돼 영화를 보고자 한다면, 크게 놓치는 부분이 있게 된다. 지나친 디테일을 보다가 전체 숲을 보지 못하고 미로를 헤맬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자본은 이런 현상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디어의 부가가치란 것은 확대재생산을 통해 구축되는 대중의 반응을 에너지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언론환경도 이와 유사한 경향이 눈에 띈다. 온갖 미시적 정보를 나열하여 사건사고를 호도하고 그 숲을 보지 못하게 한다. 때론 너무도 사적인 영역에 저널리즘의 온 화력을 쏟아 붓고, 침소봉대로 사건을 확대시켜 사회적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광풍수준이다. 이는 정치혐오증을 유발케 한다. 도리어 언론이 ‘찌라시’를 흔들어대고, 오히려 거대 악으로서 사회 부조리를 보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로써 그들은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것인지, 도대체 어떤 후속편을 기대하는지 그 저의가 궁금하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