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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주의 언론과 진실 사이] 두 영화 이야기, 두 신문 이야기-민중의소리

  • 조회수 452
  • 작성자 미디어스쿨관리자
  • 작성일 21.01.14

기사원문


[송현주의 언론과 진실 사이] 두 영화 이야기, 두 신문 이야기


유난히 더 차분하게 보낸 연말연시지만 예년에 비해 더 특별한 게 있었다면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 때문이다. 나름의 공통분모를 찾자면 언론과 카르텔, 언론에 의한 민주주의의 파괴 정도가 될 것이다. 영화, 아니 영화 속 현실은 분노와 좌절에서 시작해 특별한 반전 없이 절망과 비관으로 관객을 몰아가는데, 나는 ‘어떻게든 잘 되겠지’하는 근거 없는 낙관으로 마음을 추슬렀다. 민주주의 역사가 길지 않은 나라들에서 예외 없이 나타나는 기득권 세력과 언론의 결탁인데, 새삼스럽게 생각하면 마음의 병만 키울 뿐이기 때문이다.  

[족벌]. 영화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벌’(閥)의 의미를 최대한 살려 뜻을 풀어보면, 핏줄로 엮인 힘깨나 쓰는 패거리다. 물론 조선일보 방 씨, 동아일보 김 씨 일가가 4대에 걸쳐 가업을 경영하는 게 족벌 언론으로 매도할 일이냐고 따질 수 있다. 대한민국은 업종을 불문하고 족별 경영이든 가족 경영이든, 그걸 안하는 게 예외인 나라 아닌가. 그렇다고 가문으로 불러주기에는 그 일가가 쌓아온 명예나 덕이 없어도 너무 없다. 그냥 ‘집안’ 정도로 불러주면 무난하지 싶다. 사실 [족벌]은 가족의 소유나 상속을 문제 삼는 영화는 아니다. 그런데 말이 나온 김에 따져보고 넘어가자. 어떤 소유 형태가 좋은 언론을 만드는가? [뉴욕 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 등을 사례로 들면서 언론사는 개인이나 가족이 경영하는 게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몇몇 최상급 사례를 일반화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주가 든든한 버팀목이 돼 온갖 외압으로부터 언론 자유를 지킬 거라는 기대 자체가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2014년에 이탈리아 출신의 한 언론학자가 32개국 211개 미디어 기업을 분석해 보니, 소유가 집중될수록 즉 법인이나 단체보다 개인이나 가족이 경영할 때 기자들의 편집 자율성은 더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연한 결과다. 언론사의 사주는 기자들의 언론 자유를 보장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언론사를 운영한다. 뉴욕 타임스의 사주도 수시로 제안이나 지시, 불만을 적은 메모를 편집국장에게 전달하곤 했다. 민간 기업인 언론사의 기자들은 근본적으로 사주의 의지를 거부할 수 없는 피고용인인 것이다. 그래서 사주나 그 일가가 추구하는 사회정치적 가치가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영화 ‘족벌 두 신문 이야기’                          
영화 ‘족벌 두 신문 이야기’ⓒ뉴스타파

4대에 걸친 족벌 언론 다룬 [족벌]
룰라 구속과 지우마 탄핵 다룬 [위기의 민주주의]
카르텔을 깨뜨릴 방도는 무엇인가
 썩은 물을 퍼낼 수 없다면 깨끗한 물을 계속 흘려 넣는 방법 밖에


 그렇다면 조선·동아일보의 사주 일가가 추구해 온 가치는 무엇인가? 영화 [족벌]뿐만 아니라 조선·동아일보 100년에 관한 연구들에서 4대를 이어온 그들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권력의 편에 설 것.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후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사독재체제 하에서 그들은 한 번도 권력의 반대편에 서 본적이 없다. 1940년 조선총독부가 조선·동아일보의 폐간을 결정한 이유는 두 신문이 식민지배와 군국주의에 저항해서가 아니라, 전쟁으로 물자도 부족한 상황에서, 기관지랑 별반 다르지 않은 신문을 더 찍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원 절약 차원의 폐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사주들은 두둑한 보상금을 챙겼다. 군사독재 하에서 있었던 일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일제강점기 막판 조선·동아일보가 1면에 경쟁적으로 게재했던 일본국왕 내외의 사진, 그리고 쿠데타 이후 지면에 인쇄된 전두환의 가족사진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이 그 모든 걸 상징한다. 물론 신문을 계속 낼 것인지 말 것인지의 선택만 주어졌던 엄혹한 시절에, 추구했던 가치를 따져 묻는 건 질문을 가장한 비난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선택의 자유가 적을수록 책임도 줄어들어야 하는 법이긴 하다. 하지만 1987년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들의 선택이 기득권 세력과의 결탁이었다는 점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위기의 민주주의]. 브라질의 노동자 출신 대통령 룰라와 그 뒤를 이은 지우마 대통령이 국영 석유기업 관련 스캔들로 수감되고 탄핵까지 당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 영화다. 사건을 수사하던 검사(겸 판사)는 전 현직 대통령 간 통화까지 도청해 언론에 공개하고, 룰라가 거주하던 아파트에 대한 압수수색은 실시간으로 텔레비전에 중계된다. 거리로 나온 반대파 시민들은 군부의 개입까지 요구하지만 그 반대편에 선 대통령 지지자들은 울먹인다. 의원들은 경기침체로 인해 피폐해진 민생을 탄핵의 주된 이유로 내세운다. 지우마 대통령의 탄핵, 그리고 지지율 1위를 달리던 룰라의 재수감과 대선 후보 자격 박탈이 그 쓸쓸한 결말이다. 그 격랑 아래 숨겨져 있을 진실은 알 수 없다. 룰라에 대한 유죄 판결문에 증거는 없이 진술만 인용됐고, 당시 스캔들에 좌우를 막론하고 다수의 정치인이 연루됐으나 현직 의원들은 면책 특권의 보호를 받았고, 탄핵 이후 내각에 부패 정치인들이 대거 장관에 임명됐으며, 담당 검사는 법무부장관으로 취임했다는 정도가 겉으로 드러난 사실이다. 한편 브라질에는 9개 집안이 거의 모든 미디어를 소유하고 있고 공영방송은 유명무실하다. 지구 반대편 족벌은 더 강고하다. 그래서일까? 퇴임 당시 지지율이 80%에 달했을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렸던 룰라 대통령도 8년의 재임 기간 중 언론을 개혁하지 못한 걸 가장 뼈아픈 실책이라고 말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넷플릭스 캡처

197-80년대 군사독재가 종식되거나 혹은 1990년대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된 나라들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과두제가 등장했다. 권위주의체제는 민주적 정치 제도로 대체되지만, 실질적으로 국가는 민중의 의지가 아니라 엘리트들 간의 견제와 타협의 결과에 따라 운영된다. 대다수 민중은 정치에서 소외되고 그들의 요구는 묵살당하기 일쑤다. ‘수직적 책임성’의 약화와 ‘수평적 책임성’의 강화, 즉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지지자들을 제대로 대표해 주지 않고, 자기들끼리는 서로의 특권을 인정하고 건드리지 않는다. 하지만 정권이 교체되고 새로운 개혁이 시도될 때마다 정치 세력 뒤에 숨어있던 과두제의 기득권 실세들이 하나둘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나라의 경우 군부, 재벌, 고위 관료, 검찰, 사법부 등등이 그들이다. 우리나라 언론, 특히 1987년 민주화 이후의 보수 언론은 기득권 실세들의 연합을 굳건하게 하는 동아줄 혹은 시멘트였다. 때로는 그들의 입과 스피커가 됐고 때로는 그들을 대신해 칼을 휘두르는 행동대원 역할도 떠맡았다. 이회창 차떼기나 박근혜 탄핵 이후처럼 기득권 세력이 지리멸렬할 때는 야전 사령관, 비상대책위원회 역할도 했다. 영화 [족벌]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지만, 사주 일가의 혼맥과 그들이 벌이고 있는 각종 사업을 통해 그 거대한 카르텔의 실체를 보여준다. 그것만으로도 관객이나 시청자는 고구마 100개를 먹은 답답함과 막막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 영화와 브라질 영화 둘 다, 그 카르텔을 깨뜨릴 방도에 대해서는 털끝만한 힌트도 주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썩은 물을 퍼낼 수 없다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깨끗한 물을 계속 흘려 넣는 방법 밖에 없다. 그래서 낙관주의자의 여유가 필요하다. 조선·동아일보가 100년에 걸쳐 쌓아 온 권력 아니겠는가. 올해는 법조기자단 해체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그들이 아닌 언론도 취재와 보도의 자유를 누리며 공정한 경쟁을 할 때 물은 더 맑아질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족벌]을 제작한 ‘뉴스타파’와 이글이 실리는 ‘민중의소리’에 작은 금액이나마 정기 후원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