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ome
  • 알림마당
  • 뉴스/활동사항

뉴스/활동사항

[월요 시네마] 데미지 / 이황석 교수 칼럼

  • 조회수 172
  • 작성자 미디어스쿨관리자
  • 작성일 20.07.14

[월요 시네마] 데미지

 http://www.m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457                  

  • 칼럼니스트
  • 승인 2020.07.13 09:57
  • 댓글                          0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루이 말 감독의 1992년 작 ‘데미지’는 상처에 대한 영화다. 금기를 깬 남녀의 지독한 사랑이 할퀴고 간 영혼의 스크래치와 그 전이방식에 대해 그리고 있는 수작이다. 그런데 타부를 다루는 대부분의 텍스트가 자멸이라는 형벌로 마무리되지만 '데미지'는 다른 방식을 취한다. 두 남녀주인공 대신 그 아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가족은 해체된다.

배경은 영국, 정부각료인 주인공 스티븐 플레밍(제레미 아이언스 분)은 의사 출신으로 보수적인 가정의 가장으로서 전형성을 띤 완벽한 인물이다. 실력자인 장인의 후광으로 고위직에 오른 그는 마음만 먹으면 최고의 권력을 차지할 수도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만 원하지 않는다. 그는 평소 아내에게 “권력보다는 가족이 더 소중하다.”고 공언한다. 

그러나 장성한 아들 마틴이 여자 친구 안나 바튼(줄리엣 비노쉬 분)을 데리고 오면서 모든 것은 통제 밖의 상황이 되고 만다. 스티븐과 안나는 첫눈에 끌리고 그들은 모든 금기의 이유를 외면하고 곧바로 서로의 몸을 탐닉한다. 그들이 나누는 정사신에서 둘이 같이 눈을 가리는 장면이 나오는 이유인데, 행위 이후의 후회와 회한의 정서로 눈을 찌르기보다 그들은 행위의 순간 질끈 눈을 감는 것을 선택한다.  

만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과감해지는 그들의 사랑은 도발적이며 공격적이다. 아니 서로에게 가학적이기까지 하다. 사랑의 공식으로서 ‘피학과 가학의 메커니즘’이 자리 잡을 곳은 없어 보인다.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당신과 함께하는 것을 택하겠다고 말하는 스티븐에게 안나는 “당신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나로 대체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응수하며 거절한다. 그녀가 원하는 방식은 사랑으로 상처를 치유하기보다 불륜으로 상처를 확인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공 안나를 ‘팜므파탈’의 캐릭터로 간주하는 것은 오류이다. 정사의 목적이 파괴에 있지 않고 관계의 지속에 있기 때문이다. 안나는 스티븐과의 정사를 위해 그의 아들 마틴과 결혼을 선택한다. 가족의 구성원이 돼 지근에서 관계를 지속하기 위함인데, 타부를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으로서 가족제도에 기투하는 것은 엄폐와 은폐의 한 방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그녀의 근원적 상처 역시 가족에게서 연유돼 있다. 외교관의 자식으로 세계 곳곳을 부유하듯 전전해온 안나에겐 이기적인 부모보다도 더 의지할 수 있는 오빠가 있었다. 결핍의 대체로 금기를 뚫고 재구성된 남매의 관계는 밀착을 넘어 집착에 이른다. 사춘기의 안나가 남자친구 피터를 사귀자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한 그녀의 오빠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안나는 오빠의 주검을 안고 오열하다가 자신을 진정시키고자 애쓰는 피터와 원초적 욕망에 이끌려 정사를 벌인다. 흡사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가학과 피학의 위치로 설정된 위장된 사랑의 관계에 집착하는 남녀의 교합과 닮아있다. 오직 안나에겐 오랜 연인 사이인 피터와의 관계만이 이러한 공식이 성립된다. 이유는 상처보다는 결핍 자체를 견딜 수 없다는 데 있다. 일반적인 남녀의 관계라 할 수 있는데, 가학과 피학의 경계를 선회하며 서로의 역할을 수행한다. 피터(peter)는 부재한 아버지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상처를 준다’는 내러티브의 결말이 자멸 혹은 공멸에 있지 않은 이유는 그 목적이 전이(Trans)에 있다. 전이는 궁극적으로 분노의 대상을 찾는 과정으로서 일종의 의례이기에 대상의 파괴는 ‘희생제의’일 뿐이다. 안나가 스티븐과의 만남에서 경고한 대로 상처받은 이들은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기에 그녀는 그를 떠나고, 그는 자살 대신 세상에 머무르는 것을 선택한다. 

영화는 우리에게 원초적으로 프로그래밍 된 욕망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듯하다. 정사신 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신이 먹는 장면인 이유가 거기에 있는데, 마치 어떤 대상을 갈구하는 것이 식욕과 같은 차원의 근본적인 욕망일 뿐이라고 항변하듯이 극 중 캐릭터들은 음식을 향유한다. 삶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는 이들이라면, 식욕을 느낀다. 

식음을 전폐함이 생의 의지가 없음을 의미한다고 하면 사랑을 갈망함은 식욕과 마찬가지로 살아있음에 대한 증거이다. 다만 그것이 동물계의 범위를 벗어나 통제되는 것과 아닌 것으로 구분되는데, 스티븐은 후자를 선택했고 심지어 아들 마틴과의 대화에서 행간을 숨긴 채 자신의 행위에 대해 동의를 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약혼녀와 아버지가 벌이는 정사를 우연히 목격한 마틴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주춤거리며 뒷걸음치다가 난간에서 추락한다. 한 사람의 성인과 성인으로서 늙은 아버지에게도 리비도가 있음을 인정한 마틴이지만 그 대상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안나와 뒤엉켜 아들의 눈과 마주친 사내는 이제 자신의 눈을 찌르든지 아니면 창밖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야 하지만, 그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영화는 금기를 목격한 주체가 아들인 이상 죽어야 할 이는 이미 내정돼 있다고 말하는 듯싶다. 이제 벌거벗은 아버지는 주검이 된 아들의 시신을 부여안고 오열한다. 두 욕망이 충돌하는 순간이다. 

살며, 사랑하며 죽어가는 생물계에서 유독 금기와 도덕, 윤리가 강제되는 것은 그것이 나를 넘어선 우리의 생존을 도모하고 영속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기인했을 터이다. 종족의 번성과 번영을 위해 인류는 가족제도를 고안했고 그 속에서 통제된 삶을 지향해 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족을 기반으로 한 세상의 모든 제도와 체제가 저마다의 이유를 차치하고, 궁극적으로는 인류라는 ‘이기적 유전자’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함이라는 항변이지 않을까 싶다.

이 때문에 문학과 예술은 금기를 다룬다. 이를 통해 끊임없이 ‘너는 누구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는 것이다. 상상의 체제를 만든 우리는 늘 그것에 소외돼 왔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해 왔다. 따라서 문학을 통해 금기를 들춰내고 윤리와 도덕을 해체하는 것, 역시 우리 삶의 근원 근처를 맴도는 숙명과도 같은 상처를 직시하기 위함이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